영어 오답 노트, 세 페이지에서 끝나는 이유

필통이나 서랍 깊숙한 곳에 영어 오답 노트가 한 권씩 묻혀 있는 집이 많다. 꺼내 보면 상태가 비슷하다. 앞의 세 페이지는 문제 번호와 붉은 펜 메모로 차 있고, 네 번째부터는 백지다. 표지에 적힌 시작 날짜로 세어 보면 마지막 필기는 대개 그로부터 열흘이 채 안 된 시점이다. 그 세 페이지에 있는 서른 개쯤의 오답은 노트가 닫힌 뒤로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이 글은 그 노트에 관한 글이다. 다만 범위를 먼저 좁힌다. 오답노트를 검색하면 수학용 양식과 인쇄용 표가 먼저 나오는데, 그쪽은 다루지 않는다. 영어 공부를 하다가 틀린 표현을 모아 두고 그걸 점수와 실력으로 바꾸고 싶은 경우에만 유효한 이야기다. 결론부터 적으면 오답노트의 가치는 적는 행위에 있지 않고 정해진 날의 재회에 있다. 대부분의 오답노트는 그 재회가 예약돼 있지 않아서 죽는다.

세 페이지에서 멈추는 건 의지가 아니라 구조다

멈추는 패턴이 사람마다 비슷한 건 의지가 비슷해서가 아니라 구조가 같아서다. 쓰기는 동기가 살아 있는 시험 직후에 몰아서 일어난다. 노트를 펴고, 틀린 문제를 옮기고, 메모를 남긴다. 여기까지는 손이 간다. 그런데 노트를 다시 열게 만드는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이레 동안 하루 여섯 개씩 적었다면 노트에는 마흔두 개의 오답이 쌓여 있다. 이 마흔두 개 중 무엇을 언제 다시 볼지 정하는 규칙이 노트 안에 하나도 없다.

기록은 읽혀야 사는 데, 사람은 완성된 문서를 잘 안 읽는다. 사정을 더 까칠하게 만드는 건 잊는 속도다. 적은 직후부터 사라지기 시작해 처음에 가장 가파르게 줄어든다(망각 곡선). 이레 만에도 넉 중 하나 꼴만 선명하다는 게 오래된 기억 실험들의 정리다. 노트를 나중에 다시 열었을 때 표현이 낯설해져 있는 건 정상이고, 그 낯설어진 상태에서 다시 공부하는 셈이 된다.

오답노트의 본체는 다시 만나는 약속이다

오답노트가 하는 일을 쪼개면 둘이다. 무엇에 걸렸는지 지목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잊기 전에 다시 만나게 하는 일. 첫째는 종이도 한다. 문제는 둘째다. 잊기 직전의 만남이 몰아서 반복한 만남보다 오래 남는다는 정리가 간격 반복 연구고, 다시 만날 때는 읽지 말고 스스로 꺼내 보게 해야 한다는 정리가 테스팅 효과다. 오답노트가 살아 있으려면 이 조건들이 매일 돌아야 한다. 지목할 목록, 물어 보는 방식, 그리고 틀리면 다음 만남을 당기는 규칙. 종이에는 첫 번째만 있다.

그래서 오답노트를 살리는 수정은 양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 오답에 다시 볼 날을 매기는 것이다. 손으로 이 일이 가능한지는 아래에서 보고, 먼저 영어에서 무엇을 카드로 만들지 가른다.

영어 오답 중 카드가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

오답을 전부 적으면 오히려 죽는다. 다시 만나도 고쳐지지 않는 항목이 큐를 채우면 진짜 고쳐질 항목이 만날 기회를 빼앗기기 때문이다. 가르는 기준은 하나다. 다음에 비슷한 자리에서 또 걸릴 가능성이 있는가.

틀린 이유정체다시 만나야 할 형태
단어 자체를 몰랐다어휘 오답그 단어가 나온 문장 한 줄
단어는 아는데 문맥의 뜻이 달랐다다의어 오답문맥의 뜻과 함정으로 끌어당긴 뜻의 짝
읽으면 아는데 소리로 받지 못했다소리 등록 부족그 소리가 나오던 자리의 재생
지문이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이해 오답카드가 아니다. 개념을 다시 읽을 자리

위 표의 셋째 줄까지가 카드 감이다. 전치사, 구동사, 숙어, 아는 단어의 다른 뜻처럼 답이 외워지는 단위가 여기 속한다. 넷째 줄은 카드로 만들면 안 되는 경우로, 문법 해설이나 지문 구조를 다시 보는 쪽이 맞다. 억지로 카드로 만들어 둔 개념 오답은 복습마다 틀려서 시간만 가져간다.

토익 오답노트는 원인 분포가 다르다

토익을 보는 사람의 오답노트는 다른 영어 시험과 결이 다르다. 모르는 단어보다 아는 단어가 다른 옷을 입고 나와서 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두 갈래다. 하나는 바꿔 쓰기다. 지문의 fill out an application이 문제에서는 complete a form으로 나오고, on short notice가 quickly로 바뀐다. 다른 하나는 다의어다. address는 주소이면서 연설하다이고 처리하다이고, fine은 벌금이면서 훌륭하다이고, order는 주문이면서 순서이고 명령이다. 이런 시험에서 오답의 정체는 몰라서보다 비슷해서다.

그래서 토익 오답노트에 남길 것은 문제 번호가 아니라 정답의 근거가 된 짝 한 줄이다. 내가 함정에 빠진 그 짝, 예컨대 complete a form과 fill out an application을 붙어 있는 채로 적는다. 소리로 못 알아들어서 틀린 LC 오답은 별개의 병으로 취급해야 한다. 진단과 카드 만들기는 토익 LC 공부법이 다룬다.

손으로 유지할 때 최소한으로 더할 것

양식 논쟁은 오답노트 글의 단골 소재다. 줄노트가 좋은지 표가 좋은지. 그러나 무엇을 적는 칸이든 오답을 다시 열게 만들지는 못한다.

양식적는 부담다시 열리는 힘
세로 줄노트에 문제 번호와 메모가장 가볍다없다. 다 쓴 문서로 남는다
오답, 정답, 메모의 표중간없다. 정리된 느낌만 남는다
여기에 다시 볼 날 칸을 추가중간있다. 그 칸이 그날의 지목을 대신한다

결론은 표의 마지막 줄에 있다. 어떤 양식이든 다시 볼 날이 적힌 칸이 있어야 오답 기록이 아니라 복습 목록이 된다. 그리고 이 칸을 운영하는 비용이 손 방식의 한계다. 오늘 적은 여섯 개에 각각 날짜를 매겨야 하고, 다음 날은 돌아온 것을 찾아 펴야 하고, 미루면 미뤄진 칸이 쌓인다. 사흘쯤 지나면 날짜를 매기는 쪽이 먼저 무너진다. 오답노트는 양식에서 죽는 게 아니라 달력에서 죽는다.

오답이 스스로 다시 오는 구조

저는 이 구조를 만드는 쪽(Piccard)에서 일하고 있어서, 오답이 도구 안에서 어떻게 돌아오는지를 적는다.

평가가 곧 오답 기록이다. 복습 화면에서 카드는 네 단계(다시/어려움/좋음/쉬움)로 평가된다. 다시를 누르면 FSRS-6가 그 카드의 다음 간격을 짧게 잡아 다음 큐에 올리고, 목표 유지율은 0.9로 고정돼 있다. 나머지 세 단계는 재회의 질을 묻는다. 맥락이 반쯤 남은 오답은 어려움, 뜻이 무난히 떠오르면 좋음, 바로 나오면 쉬움이다. 실패의 기록이 별도 문서가 아니라 평가 이력 그 자체라는 뜻이다. 틀렸다는 사실을 어딘가에 적는 단계가 없고, 적지 않아도 다음 만남이 당겨진다. 종이 오답노트에서 사람이 매일 하던 날짜 계산이 이 안에서는 평가 한 번으로 끝난다.

틀린 문장이 틀린 자리에서 돌아온다. 자막이 있는 영상에서 저장한 카드는 복습 때 그 문장이 나오던 영상 시점을 재생한다. 단어를 처음 만난 문장, 그러니까 오답이 일어난 맥락이 카드와 함께 돌아온다. 소리로 걸렸던 오답이면 그 소리가, 읽다가 걸렸던 오답이면 그 문장이 같이 온다.

자막이 있는 영상에서는 줄 단위로. 확장을 켜면 영어 자막과 한국어 자막이 함께 표시된다. 못 알아들은 줄이나 처음 보는 표현을 클릭하면 그 줄의 카드 후보가 오고, 남길 것만 골라 저장한다. 영상 하나가 통째로 카드 묶음이 되는 길은 없고, 자막이 없는 영상에서는 후보 자체가 없다.

기출지와 교재 페이지는 올려서. 사진이나 pdf를 올리면 단어·뜻·예문이 담긴 후보 카드에 높음/중간/낮음의 우선순위가 매겨져 오고, 높음부터 정렬돼 미리 선택돼 있다. 고른 것만 확정한다. 한 번에 최대 스무 장이다. 올린 페이지가 그대로 카드가 되는 일은 없다.

읽다가 걸리면 두 번 클릭. 지문이나 스크립트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에서 두 번 클릭하면 팝업 사전이 뜨고, 한 번 더 누르면 카드가 된다. 읽기 중에 생긴 어휘 오답을 그 자리에서 처리하는 길이다.

받아 적기는 영어 오디오만. 음성이나 영상 파일을 올려 받아 적는 기능의 대상은 영어 소리뿐이다. LC 오답을 재료로 삼을 때 쓰고, 영어 말고 다른 언어 음원은 받아 적을 수 없다고 적어 둔다.

하루 분량의 산수

실전셋 백 문제를 풀어 열다섯 개를 틀었다고 하자. 그중 카드 감은 어휘와 표현 오답인 여덟 개 안팎이다. 하루에 이 정도면 시작 에너지 150은 열여드레를 채우고도 여섯 장 몫이 남는다. 수는 예시고, 걸러 내는 기준이 같으면 비슷한 칸에 들어온다. 조심할 반대쪽이 있다. 틀린 것을 전부 카드로 밀어 넣으면 이해 오답까지 큐에 들어와서 복습 시간을 가르는 순서가 뒤바뀐다. 오답노트가 아껴야 하는 건 페이지가 아니라 다음 만남의 자리다.

이 길이 아닌 때

시험이 일주일 남았다면 새 오답 덱을 짓지 않는다. 간격이 한두 번 벌어지기도 전에 시험이 와서, 쌓는 동안의 이득이 회수되지 못한다. 쓰던 실전셋과 틀린 문제 재확인 루틴을 유지하는 편이 낫다. 오답의 원인이 어휘가 아니라 문법이나 지문 이해에 있으면 이 글이 아니라 개념 복습이 먼저고, 억지로 만든 개념 카드는 복습마다 틀리기만 한다. 오답을 스케줄로 바꾸는 원리 전체, 저장과 인출과 유지의 흐름은 암기 잘하는 법이 정리해 둔다. 점수가 아니라 말이 목적이라면 영어 회화 독학 쪽이 출발점이다.

비용

Piccard의 구조만 적는다. 시작할 때 150 에너지가 주어지고, 카드 한 장에 1 에너지다. 쓴 만큼만 $5/$10/$20 충전하는 구조라 매달 나가는 돈은 없고, 충전한 에너지는 만료되지 않는다. 요금은 사이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시작

Piccard 크롬 확장 설치 후, 오늘 틀린 문제에서 카드 감 한 개를 골라 만든다. 자막이 있는 영상을 보다가 못 알아들은 줄을 클릭해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내일 그 카드가 큐에 오고, 다시를 누르면 그다음 만남은 더 가깝게 잡힌다. 오답노트가 세 페이지에서 끝나지 않는 건 그 지점부터다.


(소리로 못 알아들은 오답의 진단은 토익 LC 공부법에서, 오답을 스케줄로 바꾸는 원리는 암기 잘하는 법에서, 시험 뒤 회화로 이어가는 길은 영어 회화 독학에서 다룹니다.)

전체 글 목록은 Piccard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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