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 영단어, 어디까지가 기초인지 정한 사람은 없다

'기초 영단어'를 검색하는 사람은 대개 영어를 다시 시작하는 성인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참이 지났고, 뭘부터 외워야 할지 정리가 안 돼 있는 상태에서 '기초 영단어 1000' 같은 목록을 찾는다. 목록은 금방 나온다. 안 나오는 건 그 목록이 어디서 왔는지다. 답부터 적는다. 영어의 기초 어휘를 정한 위원회나 시험은 없다. 있는 건 거대한 텍스트 더미에서 단어를 전부 셈한 통계이고, '기초'라는 이름은 그 통계의 위쪽을 부르는 관례다. 이 글은 그 통계가 무엇인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내 단어장으로 만드는지를 다룬다.

목록의 정체는 누군가의 셈이다

위키백과의 영어 최빈 단어 문서가 소개하는 Oxford English Corpus는 20억 단어가 넘는 텍스트 묶음이다. 소설, 신문, 학술지, 잡지, 의회 회의록, 블로그, 채팅까지 모은 뒤 나온 말을 전부 센다. '기초 영단어'라는 제목으로 유통되는 목록 대부분은 이런 코퍼스의 셈, 또는 그 셈을 편집한 목록을 내려받은 것이다. 교사가 학습 순서로 골라 놓은 것도, 시험이 범위로 정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목록마다 순서가 다르다. 신문 기사 더미에서 세면 언론 어휘가 오르고, 채팅 더미에서 세면 구어 표현이 오른다. 같은 문서는 1960년대 브라운 코퍼스 분석의 결과가 지금의 코퍼스와 비슷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고도 적는다. 무엇을 셌는가가 순위를 결정하니, 목록을 받을 때 함께 확인할 것은 순위가 아니라 '무엇을 셈했는가'다.

위쪽이 두껍고 아래가 얇은 산수

목록의 위쪽이 유난히 두꺼운 건 언어의 성질이다. 단어를 빈도 순으로 세우면 쓰임은 순위에 반비례한다는 지프의 법칙이 그 이름이다. 1위 단어는 2위보다 두 배쯤 자주, 3위보다 세 배쯤 자주 나온다. 같은 문서가 드는 브라운 코퍼스 예시에서 the는 전체의 약 7%, 2위인 of는 약 3.5%다.

그 산수가 실제 텍스트에서 어떻게 쌓이는지, 인용할 수 있는 숫자만 적으면 이렇다.

범위텍스트에서의 몫숫자가 나온 곳
최빈 25단어인쇄 자료의 약 3분의 1Oxford English Corpus 분석
최빈 100단어쓰인 영어의 약 절반같은 분석
어휘 135개브라운 코퍼스의 절반지프의 법칙 문서의 예시

25, 100, 135 같은 구체적 값은 코퍼스와 세는 법에 따라 움직인다. 표제어로 묶었는지, 품사를 나눴는지에 따라 순위와 몫이 달라지니, 소수점까지 적힌 커버리지 표는 장식으로 치는 편이 정직하다. 다만 위쪽이 두껍고 아래로 갈수록 얇아지는 곡선의 모양은 어느 코퍼스에서나 같다. 위에서부터 외우면 같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단어를 만난다는 방향 자체는 통계가 뒷받침한다.

첫 작업은 외우기가 아니라 걸러내기다

여기에 재시작하는 성인의 사정이 얹힌다. 빈도 순위의 위쪽은 the, you, good, school처럼 학교 영어에서 이미 만난 단어들이 차지한다. 백지가 아닌 사람에게 기초 목록 전체는 외울 분량이 아니라 확인할 분량이다. 목록을 훑으며 아는 쪽을 걷어내고 걸린 쪽만 남기면 그게 내 덱이다.

구체적인 숫자로 한 번 세 보자. 1,000단어짜리 목록에서 아는 절반을 빼면 카드 후보는 500개다. 새 카드를 하루 열 장으로 잡으면 목록 수입은 50일이면 끝난다. 받은 그대로 1,000개를 전부 카드로 만들면 같은 기간을 맞추는 데 하루 스무 장부터 시작해야 한다. 복습 분량은 매일 새 카드 위에 얹히는지라 시작을 느리게 잡는 쪽이 살아남는다. 물론 여기 숫자는 예시일 뿐이다. 목록의 크기와 아는 비중을 바꿔 치면 독자의 계산이 나온다.

목록을 내 덱으로

저는 이 흐름을 만드는 쪽(Piccard)에서 일하고 있어서, 이하의 도구는 Piccard로 적는다.

올려서 후보 받기. 빈도 목록은 텍스트로 붙여넣어도 되고 받아둔 pdf나 사진을 올려도 된다. 그러면 단어·뜻·예문이 달린 카드 후보가 내려오는데 후보마다 우선순위가 매겨져 있다(높음·중간·낮음). 높음에 해당하는 후보에는 체크가 된 상태로 도착하고, 확인을 누르면 그중 스무 장까지 카드로 저장된다. 올린 목록이 그대로 덱이 되는 경로는 없다. 앞 절의 걸러내기가 도구의 작동 방식에 박혀 있는 셈이다.

목록만 밀면 정체하는 지점

그런데 목록을 끝까지 밀어도 성적이 멈추는 지점이 온다. 이유는 세 개로 접힌다.

첫째, 목록의 위쪽일수록 뜻이 문장 안에서만 완성된다. 앞서 적은 위키백과 문서는 최빈 100단어가 평균 열다섯 개가 넘는 뜻을 지닌다고 기록한다. get, take, go를 카드에 뜻 하나로 적으면 외운 건 통계의 표지판이지 그 단어의 쓰임이 아니다. 통계는 어디에 힘을 쓸지 알려주고, 문장은 그 힘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려준다.

둘째, 나란히 놓고 다시 읽는 건 꺼내 보는 게 아니다. 시험 삼아 꺼내 보는 회상이 눈으로 다시 훑는 회독보다 기억을 오래 지탄한다는 결과가 테스팅 효과 연구에서 거듭 확인됐다. 목록의 줄은 가려져 있지 않으니 다시 읽기만 남는다. 카드는 뒷면이 가려져 있어 넘기기 전에 한 번 무조건 꺼내게 된다.

셋째, 범위다. 기초 목록 1,000단어를 다 넣어도 내가 보는 영상의 자막에는 목록 밖의 단어가 계속 나온다. 목록이 덮는 몫은 위 표의 산수가 정하고, 나머지는 내가 만나는 자료가 정한다. 앞의 절반은 목록의 문제고 뒤의 절반은 수집의 문제다.

목록 밖의 절반은 자막에서 모은다

수집은 만나는 자리에서 한다. 확장을 켜고 자막이 있는 유튜브 영상을 열면 영어·한국어 자막이 함께 뜬다. 여기서의 동작은 한 가지다.

자막 한 줄 클릭. 모르는 단어가 든 문장 한 줄을 클릭하면 그 줄로 단어·뜻·예문 후보가 오고, 남길 것만 골라 저장한다. 클릭한 그 줄만 저장되고 영상 전체가 한 번에 카드로 바뀌는 길은 없다. 자막이 없는 영상에는 클릭할 줄 자체가 없다. 예문 자리에 공장에서 찍은 문장 대신 내가 실제로 들은 문장이 앉는 것이 이 경로의 본체다.

복습 간격은 알고리즘이 잡는다. 카드마다 다음에 잊기 직전인 시점을 FSRS 계열 알고리즘(Piccard는 FSRS-6)이 짚어서 그날 만날 카드만 큐에 올린다. 네 단계 평가(다시/어려움/좋음/쉬움)를 거치면 간격이 다시 계산되고, 목표 유지율 0.9가 기본값이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 잊는다는 망각 곡선과 잊기 직전의 만남만 오래 남긴다는 간격 반복 연구가 설계의 밑바닥이다. 영상에서 저장한 카드는 복습 때 그 문장이 나오던 영상 시점을 그대로 재생한다. 처음 만났던 소리와 장면에서 다시 시험받는 셈이다.

이 흐름을 만든 쪽 사람의 두 달 기록을 참고로 남긴다. 밤에 유튜브를 보며 카드를 만들고 낮에 폰에서 복습만 비우는 루프로 저장한 단어와 표현이 1,117개, 복습은 5,900번을 넘었다. 하루 복습은 70~90장이었고 거의 자투리 시간에 치웠다. 종이 노트를 세 번쯤 다시 시작했다 관두고 Anki는 카드 만들기 비용에 지쳐 관둔 사람의 기록이라, 의지가 아니라 만드는 비용을 줄인 결과로 읽는 편이 맞다.

이 글이 안 맞는 순간

이미 단어집 하나를 회독 중이라면 도구를 바꾸지 마라. 그 회독이 실감이나 점수로 이어지는 중이라면 더 그렇다. 시험이 며칠 남지 않았다면 새 덱을 짓지 말고 손에 든 목록을 세 번 읽고 마는 편이 낫다. 그리고 '기초 영단어'를 검색하는 손이 부모의 손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만드는 쪽과 복습하는 쪽이 다른 사람인 경우의 흐름은 초등 영단어 pdf에 따로 정리돼 있다. 잊고 또 잊는 문제가 먼저라면 영어 단어 암기법이 원리 쪽을 맡는다.

비용

Piccard의 구조만 적는다. 시작할 때 150 에너지가 주어지고, 카드 한 장에 1 에너지다. 쓴 만큼만 $5/$10/$20 충전하는 구조라 매달 나가는 돈은 없고, 충전한 에너지는 만료되지 않는다. 요금은 사이트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시작

Piccard 크롬 확장 설치 후 갈림길은 두 개다. 손에 든 기초 목록 앞부분을 올려 모르는 것만 골라 스무 장 안에서 저장해도 되고, 자주 보는 영상을 열어 오늘 걸린 문장 한 줄을 클릭해도 된다. 그날 저장한 카드와 그날 복습 큐를 전부 끝내면 첫날은 그걸로 충분하다. 목록이 통계의 일기라는 걸 아는 채로 시작하면, 그 아래에 내 일기를 얹는 일만 남는다.


(단어장 형태별 선택의 총론은 영어 단어장에서, 아이의 기초 영단어는 초등 영단어 pdf에서, 잊고 또 잊는 원리는 영어 단어 암기법에서 다룹니다.)

전체 글 목록은 Piccard 블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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